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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화…누가, 어떻게, 얼마나 이득을 보나

by 노안부장 posted Aug 0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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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화…누가, 어떻게, 얼마나 이득을 보나
  [밥&돈]공기업 민영화, '공공성' 논의 넘어서야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민영화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시기에도 민영화는 지속적으로 또 큰 규모로 계속되어왔으나, 현 정권에 들어서서는 그 이전에 쉽게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까지 포괄해 그 폭과 심도가 한층 강화된 민영화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산업은행과 같은 거대한 규모의 국책 은행에서 전기, 수도 등의 기간 시설을 거쳐 의료나 교육 등과 같은 인간 생활의 기본적 영역에까지 포괄적인 민영화 계획들이 논의되고 있으며,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일도 속도감 있게 진행될 기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급진적인 민영화 조치가 어떤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직감하고 있으나, 그것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따져볼 것인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다행히도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공공성'이라는 담론이 발전해왔기에 많은 논의를 낳을 준거점(referential point)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틀의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놓치고 있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 과연 그 민영화 혹은 '선진화' 과정 속에서 누가 어떻게 얼마나 이득을 보는가이다. 즉, 민영화 혹은 '선진화'라는 과정을 한국 자본주의의 자본 축적 과정으로서 이해하고 그 속에서 어느 집단 혹은 개인이 어떻게 이득을 보는가라는 고전적인 정치경제학의 문제의식이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빠져 있는 것이 현 논의의 맹점이 아닌가한다.
  
  국가와 시장, 이질적인 영역인가
  
▲ 지난 3월 코오롱워터가 후원한 청계천 걷기 대회 행사 사진.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이 코오롱그룹 출신이라는 점에서 수도 민영화의 배후세력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득 의원과 코오롱 측은 이같은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코오롱그룹

  현재의 정치 경제 담론은 국가와 시장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각각의 영역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를 보자. 국가는 기본적으로 폭력의 중앙집권으로 뒷받침되는 주권(sovereignty)을 그 작동의 기초로 삼고 있다. 주권은 법이라는 강제(coercion)를 작동 원리로, 또 위계적 명령 구조를 조직 원리로 삼는다.
  
  이에 반해 시장은 사적 소유(property)의 원리를 배경으로 삼는다. 자신의 소유물을 배타적으로 전유하는 개인들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로 타인의 소유물과 교환하기 위해 시장으로 나온다. 이렇게 이득을 위한 교환이라는 것을 작동원리로 하며 또 평등한 개인들 간의 자유로운 계약이라는 것을 조직원리로 삼는 것이 시장이라는 장이다.
  
  이렇게 사회에는 두 개의 이질적인 조직원리와 작동원리에 기초한 두 개의 영역이 존재하며, 경제적 활동 또한 이 두 개의 영역 어디를 통해 사회적으로 조직할 것이냐의 문제가 나온다는 것이 이러한 국가와 시장의 이분법에 근거한 정치 경제 담론의 기본적인 문제틀이다.
  
  과연 이러한 이분법은 올바른 것일까.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은 원래부터 정확하게 나누어져 있는 것이었을까. 그래서 태초부터 국가는 본래 법에 근거한 정치적 관계의 규제를 그 본질적 성격으로 하는 것이며, 시장은 소유권에 근거하여 '순수 경제적' 관계를 규제하는 제도로서 존재했던 것일까.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국가와 시장이 근대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 두 영역이 얼마나 서로 긴밀하게 상호 침투하면서 서로를 형성하였는가에 대한 역사적인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의 경제 활동은 소위 '공공 영역'에 제한되는 것으로서 대공황 등의 '시장 실패'가 전면화된 20세기 중반 이후에나 벌어진 일시적인 현상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을 갖는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에서 국가와 시장이라는 두 제도가 진화해온 여러 단계와 과정을 돌이켜보면 이러한 이분법은 극도로 단순화된 편의적 분류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히 보이게 된다. 특히 근대 자본주의의 국가는 그 기원과 진화 과정 전체에 걸쳐서 철저히 경제적인 성격을 본질로 삼는 사회적 장치였다.
  
  국가는 시장에서 가장 능동적인 경제 주체다
  
  근대 국가의 출현과 진화 과정을 개략적으로만 훑어보아도 후자의 관점이 훨씬 더 사실에 근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 국가가 단순히 시장질서의 법적 제도적 '인프라'만을 제공했던 것으로 이해해서는 아니 된다. 오히려 근대 국가는 이 가운데에서 대단히 능동적인 경제 주체다. 국가는 시장에서의 자본 축적을 주도한 가장 중요한 경제 주체였기에, 시장의 창출은 물론 자본 축적에서도 핵심적인 주체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무수한 사례들 가운데 두 개의 중요한
유형만을 지적한다. 첫째, 프러시아와 같이 시장질서가 상대적으로 덜 발달했던 상업화 초기의 국가들이 취했던 국가가 채산성 높은 사업 부문에 능동적 주체로 나섰던 '관방주의(Kameralismus)'의 경우. 둘째, 영국이나 네덜란드와 같이 세계 시장의 상업 및 금융 중심지에 근접해 있는 경우 과감한 금융 혁명을 통하여 아예 국가의 조세 수입 전체를 '유동화(securitization)'시켰다. 이것이 17세기에 벌어진 금융 혁명(financial revolution)의 핵심이었으며 특히 근대 자본주의 질서의 중심의 중심이라 할 근대적 화폐 금융 체제의 모태가 된 영란 은행(Bank of England)이 출현하게 된 계기였다. 즉, 자본주의 발달에 있어서 국가가 그저 법질서 확립과 같은 제도적 환경만을 창출하는 것으로 역할을 제한하지 않았다. 이는 한국 자본주의의 성립 과정에서도 나타났던 일이지만, 21세기 오늘날의 세계 경제에서도 무수히 발견되는 일이다.
  
  국가와 시장 혹은 국가와 자본은 16세기 근대의 시작부터 항상 연속선이었지, 결코 어떤 단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국가와 시장/자본이 연속선이라는 것을 잘 이해한 쪽은 '민영화'를 반대하는 쪽이 아니라 주도하는 쪽이 먼저이다. 국유국영기업(소유와 경영 모두 공공 부문에 있는 기업)을 민유민영기업(소유와 경영 모두 사적 부문에 맡긴 기업)으로 넘기는 고전적인 '민영화' 혹은 '사유화(privatization)'는 80년대 이후 전 지구적 차원의 저항에 부딪혔다.
  
  그래서 이렇게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두부 자르듯 한쪽으로 모는 관행 대신 소위 '민관 협력 체제(PPP: Public Private Partnership)' 같은 것들이 90년대 중반 이후 주도적인 형태로 생겨났다. 소유 구조와 지배 구조 모두 국가 부문과 사적 부문을 다양하게 섞는 여러 변칙적 방법을 마련함으로써, 공공성 담론에 근거한 공격을 피하면서도 근대 이후 자본주의 국가가 수행해왔던 '자본의 누에고치'의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조치의 이름이다. 아마도 2008년 한국에서 선호되고 있는 이름은 '선진화'이다. '전문가' - 전문 기업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 에게 경영을 맡기면서 소유 구조도 적당히 국가가 일정하게 쥐는 형태가 이제까지 나온 모습이다.
  
  민영화가 누구를 살찌우는가
  
  여기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 있다. 국가이든 시장 혹은 자본이든 그것은 몰인격적인 제도와 장치를 일컫는 한줌의 추상명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국가를 쥐고 있는 구체적인 개인 혹은 인간 집단은 누구인가? 시장 및 자본을 주도하고 있는 구체적인 개인 혹은 인간 집단은 누구인가? 국가든 시장이든 자본이든 모두 똑같은 '자본 축적'의 연속선 위에 있는 장치들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면, 그 자본 축적의 핵심에 있는 구체적 개인 혹은 인간 집단들도 가시적 비가시적 형태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지배 블록(ruling bloc)'의 개념의 근거이다.
  
  민영화 혹은 '선진화' 조치에 맞서서 '공공성' 담론을 앞세운 비판의 논리는 중요한 쟁점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공공성' 패러다임에서 도무지 제시하기 힘든 아주 예리한 쟁점 하나가 있다. 그것은 '민영화 혹은 '선진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얼마나 이득을 보는가'이다.
  
  예를 들어 현재 진행 중인 산업은행의 '선진화'와 상하수도 사업의 '선진화' 과정을 보자. 응당 이러한 과정이 '공공성'이라는 가치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이 벌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산업은행의 매각과정에서, 또 각 광역 지자체의 상하수도 사업의 '선진화' 과정에서 거기에 달라붙는 사적 부문의 파트너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이들은 현재 정권과 과연 어떤 인적 사업적 관계가 있는지 (혹은 없는지), 그리고 전체 과정에서 어느 만큼의 이득을 어떤 방식으로 취하게 되는지, 그러한 과정에서 국가는 자신의 공공 기구로서의 석명성(accountability)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등의 문제 또한 응당 다루어져야 하고 또 심도 있게 논의되어야만 한다.
  
  요컨대, '공공성'을 지키고 수호하는 작업이 소중한 만큼,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민영화 혹은 '선진화' 과정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어떻게 살찌우는 것인가 (혹은 아닌가)의 문제 또한 눈을 밝히고 따지고 감시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홍기빈/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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