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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800만 시대]사측 전략·정규직 냉담에 ‘연대의 길’ 멀어져

by 노안부장 posted Aug 1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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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800만 시대]사측 전략·정규직 냉담에 ‘연대의 길’ 멀어져
입력: 2008년 08월 17일 18:45:05
 
ㆍ3부 - (2) 노동운동의 위기

“정규직은 비정규직의 바다에 떠 있는 섬과 같다. 거센 파도는 섬의 연약한 토양을 침식한다. 비정규직에 둘러싸인 정규직 노동자의 삶이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비정규직이란 열악하고 가난하고 비숙련 노동을 하는 층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비숙련직과 전문직, 저학력층과 고학력층을 막론하고 비정규직은 확산될 것이다.”(장귀연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정책위원장)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는 비정규직 문제뿐 아니라 노동운동 위기를 해결하는 관건이다. 사진은 지난 2001년 인천 백운공원 앞에서 출근버스를 가로막고 시위 중인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들(위쪽)과 기아차도장공장을 점거 농성 중인 노동자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바로 옆에 있는 비정규직도 못 챙기면서 밖에 나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게 말이 되나.”(권태환 금속노조 타타대우상용차지부장)

박점규 금속노조 미조직비정규사업부장(38)은 금속노조의 주력 사업인 ‘1사1조직’ 운동의 실무 책임자다. ‘1사1조직’ 운동은 비정규직 노동자도 조합원의 자격을 갖도록 지부·지회의 규칙을 개정하는 것. 지난해 11월 대의원대회에서 결정돼 올해부터 사업이 시작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하나의 틀로 묶기 위한 일종의 물리적 통합 작업이다.

박 부장은 올 들어 지난 6월까지 전국 사업장을 누비고 다녔지만 사업 성과는 기대에 못미쳤다. 무엇보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반응이 미온적이었다. 교육을 마치고 나면 그가 항상 받는 질문이 있다. “사내하청(노동자)을 마음대로 자르지 못하면 결국 우리가 잘려나가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박 부장은 “기업이 사내하청을 쓰는 이유는 정규직을 줄이고 정규직 노조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이라고 대답하지만 설득이 쉽지 않다. 그는 “사내하청을 정규직 고용의 바람막이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측의 이데올로기가 먹히고 있다”고 말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언제든 해고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심어줬다. 바로 옆자리에서 일하던 동료들이 뭉텅이로 해고되는 것을 수없이 지켜봤기 때문이다. 98년 정리해고제가 도입되고 실제 노동자들이 해고되면서 우려는 현실이 됐다. “정리해고제에 따른 위협효과가 굉장히 컸다”(김성희 소장)는 평가다.

2000년 현대차노조는 정규직의 16.9% 범위까지 사내하청을 쓸 수 있도록 사측과 합의했다. 구조조정 단행 시 비정규직을 먼저 해고한다는 것을 전제한 합의였다. 이를 두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의 방패로 삼으려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2004년 노동부는 현대차의 사내하청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을 내렸다. 노조가 고용보장을 위해 ‘불법’을 묵인한 꼴이 된 셈이다.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냉담한 것도 같은 이유다. GM대우차는 2001년 회사 부도로 생산직 노동자 1750명을 전원 해고했다. 이때 해고된 노동자들은 지난해까지 단계적으로 모두 복직됐다. 해고의 아픔을 뼈저리게 겪은 이들도 GM대우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고용안정 투쟁에는 시큰둥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대적인 경우도 있다. 지난해 8월31일 사측과 임단협을 벌이던 기아차 화성공장 비정규직 지회는 압박 수단으로 도장공장을 점거했다. 그러자 관리자들과 일부 정규직 노동자, 특전사 전우회 등 700여명이 몰려와 농성 텐트를 불태우고 파업 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를 집단 폭행했다. 코스콤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공공연히 반대하다 2007년 11월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으로부터 제명당했다.

외환위기 이후 급속히 도입된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고용 유연화를 핵심으로 작동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단’은 그 후폭풍이다. ‘노동운동 위기론’도 그 연장선에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제2의 노조 민주화 운동”이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 종종 비판의 표적이 된다. 대기업·정규직·남성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수정치권과 언론의 공세야 그렇다 치지만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쓴소리가 나온다.

민주노총의 이런 이미지는 실체적 진실 여부를 떠나 ‘사회적 통념’으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험난한 시절 민주노조 운동을 개척하며 쌓아올린 도덕적 자산에도 흠집이 생겼다. 이석행 위원장은 최근 공·사석에서 “쇠고기 파업 이후 민주노총을 보는 국민의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 파업하고 박수를 받은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국민의 시선이 그만큼 싸늘했다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민주노총만큼 비정규직 문제를 놓고 투쟁한 집단도 없다. 2004년 총파업을 벌였고 비정규 투쟁사업장에는 어김없이 민주노총 깃발이 나부꼈다. 총연맹 차원의 투쟁이나 집회 횟수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물적·인적 지원도 적지 않게 했다.

그러나 개별사업장으로 내려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비정규직을 고용의 안전판으로 여기는 정서가 여전하다. 김경란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민주노총이 대기업 정규직 노조 중심이라는 것은 한계다. 그렇지만 극복할 수 있는 한계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계를 극복하려는 더욱 적극적인 노력”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많다.

2006년 11월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에 제안한 ‘사회연대전략’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비정규직을 위해 민주노총 조합원이 다달이 받는 급여 일부를 떼어 내 지원하자는 게 골자였다. 당시 이를 입안한 오건호 박사는 “국민연금 사각지대 문제를 공론화하고,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대를 이뤄내며, 노동자의 참여를 무기로 사측과 국가의 재정 참여를 압박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1석3조’의 효과를 노리는 승부수로 던져졌지만 사전 협의 부족과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 책임론을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는 반론에 막혀 실행되지 못했다.

‘사회연대전략’이 비정규직에 대한 지원 성격을 띠었다면 금속노조의 ‘1사1조직’ 운동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대등한 주체로서 ‘연대’할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을 만들려고 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실험이다. 지부·지회별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포괄하는 단일조직이 결성되면 합법적 발화통로를 찾지 못했던 비정규직도 떳떳하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기아차지부는 ‘1사1조직’ 사업에 앞서 지난해 2월 정규직·비정규직 단일노조로 통합했다. GM대우차지부는 규칙개정안은 통과시켰으나 구체적인 가입 범위나 대상은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지난해 두차례 규칙개정을 시도했다 실패한 현대차지부는 8월 대의원대회에서 또다시 개정을 추진할 예정이다. 군산에 있는 대우타타상용차지부는 지난 6월 만장일치로 규칙개정안을 가결했다.

‘1사1조직’ 운동이 기대만큼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은 정규직·비정규직 모두 통합으로 인해 자신들의 목소리가 약화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 숫자를 압도하는 조선업종 정규직 노조가 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다. 비정규직 노조로는 조직력이 강한 편에 속했던 기아차 비정규직지부가 통합을 반대했던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박점규 금속노조 부장은 “현대차지부에서 규칙개정안이 통과되면 ‘1사1조직’은 일단 커다란 흐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며 “자동차지부의 성과를 토대로 조선업종 지부를 설득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규직·비정규직이 단일 노조에 둥지를 틀더라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가 나타날 것이다.

“뭉쳐야 사는 공동운명체” 정규직의 자각이 급하다

끊임없이 문제를 풀면서 가야 하는 길”(권태환 타타대우상용차지부장)이라는 게 정확한 현실 인식이다.

정규직 자리를 줄이고 비정규직으로 채우는 고용시장의 추세를 감안하면 비정규직 문제는 곧바로 정규직의 문제다. 사진은 지난해 7월 매장점거 농성 중인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은수미 박사는 “산별차원에서 조직통합과 함께 비정규직의 조직률을 높여야 한다. 비정규직의 독자성을 높이는 교섭구조를 만드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고 조직만 통합하면 비정규직 입장에선 관리자 노조와 통합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물리적 통합’이 된다고 해도 ‘화학적 통합’을 이루기까지는 상당한 시일과 진통이 불가피하다. 이와 관련해 타타대우상용차지부의 사례는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 회사 노조는 2003년부터 단협 요구안에 사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포함시켰다. 그 결과 2003년 25명, 2004년 30명, 2005년 30명, 2006년 50명, 2007년 40명, 2008년 30명 등 총 205명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켰다. 2008년 교섭에선 매년 사내하청의 10%를 정규직으로 전환키로 사측과 합의했다.

권태환 지부장은 “신입사원으로 비정규직만 들어오다보니 조합원은 노령화되고 수도 늘지 않았다”며 “외환위기 당시 300여명의 정규직이 희망퇴직했는데 그에 상당하는 정규직을 채용해야 한다는 우리 요구를 사측이 수용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현 지부 간부의 절반 가까이가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인력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 권 지부장은 “비정규직 출신 노조간부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정규직은 절대 알기 힘든 비정규직의 처지와 마음을 이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들에겐 마음을 연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로 인해 노동자 내부의 통합력 제고라는 가외의 소득을 얻었다는 얘기다. 이들이 사내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는 선순환의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그 결과 타타대우상용차에서 근무하는 사내하청 노동자의 기본급 연봉은 2000만~2500만원으로 지역 내 최고 수준이다. 임금·복리후생만 정규직과 차이가 날 뿐 나머지는 똑같다.

정규직에게 비정규직과의 연대는 도덕적 결단의 문제이면서 같은 노동자로서 공동의 운명체로 묶여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의 문제이다.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한국자본주의는 구조변동의 과정에 있다. 언제 공장이 없어질지, 정규직 일자리가 사라질지 알 수 없다”며 “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의 좁은 울타리를 깨고 나와 지역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나름의 계획을 갖고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자신들에게 위기가 닥쳐도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이랜드일반노조가 정규직·비정규직의 장벽을 걷어내고 1년 넘게 고단한 싸움을 벌일 수 있었던 비밀도 여기에 있다.

김경욱 위원장은 “파업할 때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자리를 메우는 것을 보면서 비정규직이 파업에 동참하지 않으면 정규직도 패배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정규직을 위해 비정규직과 연대를 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은 흐릿해 보이는 공동의 운명 때문에 정규직들이 기득권의 일부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권태환 지부장은 “정규직 조합원들에게 ‘비정규직이 동참하지 않으면 우리가 파업을 해도 승리하기 힘들다. 대체근로가 이뤄지면 파업은 깨진다. 결국 우리 살자고 비정규직과 연대하는 것이다’고 이야기하지만 설득이 어렵다”고 말했다.

김경욱 위원장은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정규직 노조원의 불만도 높아졌다. 노조에 가입하지도 않는 비정규직을 위해 왜 우리가 싸워야 하느냐고 물어오면 대답하기 난감했다. 비정규직 사업을 위해 매장에 갈 때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대하면서 나도 서운한 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 작은 성과라도 만들어 신뢰를 얻어야 한다. 지도부의 헌신적이고 필사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이 말한 ‘헌신적이고 필사적인 노력’이야말로 ‘노동운동 위기론’에 답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처방일지 모른다. 민주노조의 영광을 추억하며 쓸쓸하게 쇠락할 것인가, 진보의 기지로 거듭날 것인가. 지금 노동운동은 갈림길에 서 있다.

<정제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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