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보다생명

아버지 잃은 아들들은 철이 들었고 난 오기만 남았다.

by 관리자 posted Sep 0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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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이렇게 나오면 7개월도 더 할 수 있다"

[인터뷰] 용산참사 희생자 고 이성수씨 부인 권명숙씨

차성은 기자 mrcha32@vop.co.kr
그렇게 속 썩이던 아들이 철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속만 썩이던 아들 영민(가명, 21)이가 요샌 장남 역할을 톡톡히 한다.

영민이가 중3이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영민이 이발한 것 보셨어요?” 방에 있는 영민이를 다시 봤더니 삭발을 한 채 누워있었다. 왼쪽 머리에는 일명 '바리깡'으로 '11'자를 내놓았다. 깜짝 놀랐다.

한국진보연대 2기 출범식

용산 참사에서 희생된 고 이성수씨 부인 권명숙 씨가 출범식 참가들에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함께 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김미정기자

실업계 고교 진학을 원하던 영민이를 권명숙(여, 47)씨가 우겨서 인문계 고교에 입학시켰다. 담임선생님하고도 갈등을 빚더니 결국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자퇴했다. 모든 원망이 엄마에게 향했다. 다음해 자기가 가고 싶어 하던 실업계 고교에 입학했지만 거기서도 적응을 못하고 그만 뒀다.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새벽 2~3시에 전화 벨소리가 울리면 경찰서 아니면 병원 응급실이었다. 학교를 안 보내려고까지 했었다. 어찌어찌 3년을 마쳤다.

"엄마, 내가 1번이야. 아빠 없는 애는 나밖에 없어"

영민이가 급격히 달라진 것은 아버지 사고 이후였다. 여전히 반항하고, 한창 응석부릴 고3시기였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영민이를 가장으로 만들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졸업식을 마친 영민이는 졸업장과 친구들로부터 받은 졸업 축하 꽃다발 한 아름을 아버지 영정 앞에 바치며 펑펑 울었다.

입영날짜까지 받아놨던 영민이는 입대 20여일을 앞두고 아버지를 잃었다. 훈련병이었어야 했을 영민이는 벌써 8개월째 상주다.

집안에서 돈을 벌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 영민이는 대구로 갔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동생에게 매월 20~30만원씩 용돈을 보내주면서 형 역할을 톡톡히 한다. 어려서부터 좋았던 형제간 우애는 사고 이후 더욱 깊어졌다. 아들들이 서로 챙겨주고 의지하는 모습을 보며 대견하기도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지워지지 않는다. 영민이 입대할 때 무슨 음식을 싸가지고 갈지 남편과 의논하던 기억이 아련하다.

현재 고3인 막내아들(19)을 생각하면 더 가슴이 아파온다. 언젠가 막내한테 "주위 친구들 중에 아빠 없는 친구가 있냐"고 물었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엄마, 내가 1번이야. 아빠 없는 애는 나밖에 없어." 가슴이 저려왔다. 천년만년 네 식구가 같이 살줄 알았는데 이렇게 갈 줄 알았나. 아빠의 빈자리를 애들에게 너무 일찍 안겨줘 안쓰럽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요새 들어 이틀에 한 번꼴로 남편이 꿈에 나타난다.

꿈에 나타나 생활비 건네주는 남편, 곧 생일인데 생일상을 차려주고 싶어도...

엊그제 꿈에도 남편이 나타났다.

“요새 생활 어렵지? 생활비에 보태 써.” 남편은 70만원이 든 봉투 2개와 백만원 묶음 1개, 200만원 묶음 1개를 건넸다.

예전에도 남편이 꿈에 나타나서는 “살림에 보태 써”라며 백만원 묶음 4개를 신문지에 말아서 주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그날 4백만원이 실제 수중에 들어왔다. 범대위가 모금한 돈 중 일부를 생활비에 보태라고 준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얘기를 듣고는 소름이 끼쳤단다. “먼저 간 남편이 걱정이 많이 되나 보다.”

매일 아침 남편을 만난다. 빈소에 상식을 올리며 빌고 또 빈다. “영민이 아빠, 이젠 당신도 편한 곳으로 가. 그리고 제발 우리도 살아갈 수 있게, 사태가 빨리 해결되게, 대통령이 빨리 해결하게 도와줘.”

음력 9월 1일이 남편 생일이다. 생일상 생각을 하니 눈물이 흐른다. 결혼한 지 22년.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생일상은 잊지 않았었는데 “이젠 누굴 위해 음식을 해야할 지.”

용산참사 3보1배

고 이성수씨 부인 권명숙씨가 오열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저분들 보면 힘이 납니다"

말이 7개월이지 너무 길고도 힘든 나날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해결됐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다가도 매일같이 맞닥뜨리는 정부와 경찰의 모습에 오기가 생긴다. “정부는 우리가 지쳐 떨어져 나가길 바라는 것 같은데, 그런 식이라면 앞으로 7개월도 더 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힘이 되는 것은 남일당 건물 옆에서 함께 천막을 치고 농성중인 신부님들이다.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신부들이 천막을 친 지도 5개월이 넘었다.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정당들, 여러 시민사회단체들도 항상 함께 해준다.

"저분들 보면 힘이 납니다. 전날 경찰에 맞아 온몸이 쑤시다가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게 되죠." 권명숙씨는 고갯짓으로 옆 천막에 앉아 있는 문 신부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용산범대위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이수호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이 천막에 들렀다. "오셨어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매일 경찰과 마찰이 있다 보니 첫인사는 정해져 있었다.

어제는 3보1배를 하다가 16명이나 경찰에 연행됐다. 이 과정에서 권씨도 많은 부상을 입었다. 오른손 넷째, 다섯째 손가락이 젖혀져 탱탱 부었고, 양팔과 어깨는 온통 멍투성이다. 상복마저 찢겨져 새로 입어야 했다. 그렇게 새로 입은 상복만 7번째다.

"이제는 시너통 들고 나갈 거 에요. 여기서 뭘 더 바라겠어요"

권씨는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농성중인 노동자들을 경찰이 진압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면서도 용산참사 진상규명의 단초를 봤다.


"경찰이 우리 아저씨 진압했던 것을 그대로 재연했어요. 특공대가 컨테이너 타고 옥상에 올라가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는 모습 보셨잖아요. 맞아서 실신한 노동자를 몽둥이로 계속 때리고, 방패로 찍고 벌건 대낮에 방송카메라들이 다 찍고 있는데도 그 정도였는데 이곳(용산) 진압할 때는 오죽했겠어요. 자기들이 때려죽였다는 것을 그대로 증명한 거에요."

그는 경찰이 진압과정에서 남편과 철거민들을 구타하다 죽자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불구덩이에 집어넣어 화재사로 만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망자들의 지갑, 자동차 열쇠, 플라스틱 라이터 등이 불에 그을리기만 한 채 그대로 발견된 것을 증거로 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아빠가 폭도나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는 진실은 알게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어제 경찰이 3보1배하던 사람들 잡아가는 것을 보며 어찌나 원통하던지 유리를 깨서 내 몸을 가르려고 했어요. 이제는 시너통 들고 나갈 거 에요. 여기서 뭘 더 바라겠어요."

남편 이성수씨를 잃은 용산참사 발생 225일째. 용산 남일당 건물 옆 천막에 앉아 있는 권명숙씨의 눈에서는 비장함과 함께 눈물이 흘렀다.

권명숙

고 이성수씨 부인 권명숙씨ⓒ 민중의소리 김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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